인권

여성의 날 인터뷰 4️⃣: 소설가 장류진

“역사는 크게 보면 나선형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요. 크게 보면 둥글게 둥글게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장류진 소설가님은

작가이자 소설가예요. 2018년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면서 데뷔했고, 단편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연수’,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를 썼어요.

입체적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소설 쓰고 있는 장류진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나온 단편집 ‘연수’ 이후 작가님 소식을 오랜만에 듣는 분도 많으실 것 같아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동안 경장편 소설 초고도 하나 썼고, 에세이를 연재하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 에세이집을 쓰고 있습니다.”

에세이집을 준비 중이시군요. 이전에 소설집을 준비하실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작년 여름에 여행 다녀온 걸 기반으로 여행 에세이를 준비하게 되었어요. 아직 책이 나오려면 멀었지만, 그래도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해요. (웃음)”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러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장류진 작가님 하면 딱 떠오르는 키워드는 ‘일하는 여성들’인 것 같아요. 단편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이 특히 그렇고요. 그런 인물들을 주로 다루시는 이유가 있나요?

“사실 작품을 쓸 때 ‘일하는 여성들에 집중해서 써야지!’ 생각하고 쓴 건 아니에요. 특히 ‘일의 기쁨과 슬픔’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 ‘잘 살겠습니다’ 같은 경우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그러니까 ‘일하는 여성들을 쓰는 작가다’라는 식으로 호명되기 이전에 이미 기본적인 틀이 다 갖춰져 있었거든요. 

‘이유’라고 물어보신다면, 사실 제가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그런 키워드를 골라서 쓴 건 아닙니다. 소설을 쓸 때 ‘이런 메시지를 주기 위해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야지’ 하고 쓰는 것은 아니고, 보통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나 대화, 관계 등이 계속 맴돌 때, 그리고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굴려나가다가 이야기성이 갖춰지면 쓰기 시작을 하거든요. 그걸 다 쓰고 나면 무언가 있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다 쓰고 나면 메시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안개 속을 걸어나가는 기분으로 씁니다. 

다 쓰고 나면 정말로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생각지 못했던 메시지가 고여 있게 돼요. 쓰는 동안 평소 저의 삶이나, 제가 하고 있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거예요.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열리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가 평소에 관심을 두는 생각, 사람들, 관계, 여성으로서 살아온 삶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직장 생활을 하시면서 직접 겪은 것들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그렇죠. 그 이야기들을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거기서 촉발된 생각들이 이야기에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잘 살겠습니다’는 제가 회사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면서 만난 여성들과의 관계에 대해 쓴 소설인데요. 저는 머리로는 여성들과 연대하고 응원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현실은 모든 여성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성 대 남성의 구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너무 많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상황들이 있고, 거기 가해지는 변수도 너무 많고요.”

맞아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죠.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는 그런 여성 동료들을 마음속으로 미워했던 적도 있었어요. ‘잘 살겠습니다’는 그런 경험을 용서하고, 또 용서받고 싶은 마음으로 쓴 소설이에요.”

용서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 사람들도 제게 상처주거나 제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까지 여러 상황들이 있었을 거잖아요. 평생 똑같은 행동만 반복하지도 않을 거고, 결국은 계속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을 거고요. 그래서 그런 일을 한 것을 용서해 주자고 생각했어요. 
용서받고 싶은 일은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그런 사람들을 미워했던 마음 자체를 용서받고 싶고, 또 다른 하나는 저 자신도 용서를 받고 싶었어요.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런 이상한 사람이었을 수 있잖아요. 누군가는 저를 보면서 ‘쟤는 왜 저래?’라고 생각했을 수 있거든요. 나도 만약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다면, 거기에 대한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도 담아서 썼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신 계기가 있었나요?

“딱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일종의 직관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소설이라는 건 논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써지는 게 아니거든요. 10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많은 여성 동료들을 만나면서 제 안에 쌓여왔던 것들이 어느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자석이 서로 딱 붙듯이, 아니면 전등이 딱 켜지듯이 그렇게 됐어요. 

조금 웃기게 들릴 수 있는 얘기이긴 한데요. 제가 회사를 1년 동안 잠시 쉬면서 국문과 대학원을 다닐 때 ‘잘 살겠습니다’ 습작을 썼거든요. 그때 앞부분은 대충 어떻게 쓸지 알겠는데 뒷부분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런데 수업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대학원 친구가 대화 도중에 “근데 언니는 걱정이 안 돼.”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가 걱정이 안 되냐, 나는 죽겠다 그랬더니 “언니는 회사 가서도 잘할 것 같고 소설도 잘 쓰잖아. 언니는 뭘 해도 잘 하고 살 것 같아.” 그러는 거예요. 

그때 이상하게 이 소설의 뒷내용을 이렇게 전개해 나가면 좋겠다, 아이디어가 팍 떠올랐어요. 소설 내용이랑 별로 관계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넌 잘 될 거야’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 한 마디가 저에게 자극이 된 느낌.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그래서 ‘잘 살겠습니다’의 맨 마지막에도 그 대사가 나와요. 아마 그 친구는 모를 거예요. 그날 저한테 그렇게 큰 아이디어와 용기를 줬다는 걸.”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여성 인물들이 나오잖아요. 100% 선하거나 나쁜 인물 말고,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인물들이요. 이렇게 여성 인물들의 복합적인 면을 잘 다루시는 비결이 있나요?

“사실 비결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평소 인간에 대해 하는 생각들이 있잖아요. 제가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것 중 가장 큰 게 바로 ‘세상에 100% 선한 사람 없고 완전한 악인도 없다’거든요. 인간은 되게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다. 일상 생활에서도 그렇고, 작품을 쓸 때도 그렇고 그 사실이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소설을 쓰고 캐릭터를 만들 때도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쓰게 됩니다.

물론 서사 안에서 완전한 선인이나 악인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기도 하고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제 취향은 좀 더 한 면만 가지고 있는 인물보다는 다양한 면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우당탕탕하길 바라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캐릭터를 만들 때 조금 더 신경쓰시는 부분이 있나요?

“인물을 다룰 때 한 면만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이런 면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돌려보니까 다른 면도 있네?’ 할 수 있도록요. 그리고 그 새로운 면의 결도 각각 다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소설을 쓰다가 이거 좀 밋밋한데 싶을 땐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면서 사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 사람에게 또 다른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한 사람의 다른 면을 꺼내게 되면 그때부터 이거 쓸 수 있겠다, 어떻게 쓰면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특히 여성 캐릭터를 만들 때 저의 이런 인간관이 많이 들어가는 것 같아요.”

여성 인물을 만들 때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지점이 있나요?

“저는 여성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착하거나, 못됐거나, 야망이 있거나, 소박하거나, 성숙하거나, 미욱하거나 상관 없이요. 이야기를 하나의 무대라고 친다면, 그 무대 한가운데에 여성 인물이 주연으로 서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단편 ‘새벽의 방문자들’을 보면 오피스텔 성매매를 하는 남성들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처음 이 소설을 어떻게 쓰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이 소설을 쓰는 계기가 된 건 제 첫 자취방에서 이사를 갈 때였어요. 굉장히 좁은 원룸이었는데,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포장을 할 때 보니까 제 모든 살림이 순식간에 박스 몇 개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 장면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저  ‘이 방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혼자 사는 여성의 방을 쓰려다보다 보니까 당연히 혼자 사는 여성이 느낄 수 밖에 없는 공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고요. 여러 자취방들을 전전하면서 직접 겪은 강렬했던 경험들이 생각났어요. 소설 내용과 비슷한 사건들이 제게도 있었거든요. 이상한 사람이 집 초인종을 눌러대서 공포에 떨었던 일도 실제 겪었고, 성 구매 남성이 사람을 착각하고 제게 말을 건 일도 있었고요.”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굉장히 큰 반향이 일어났던 게 기억나요.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반응도 많았고요. 혹시 그런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예상을 하고 쓴 건 아니었어요. 제가 겪은 일이랑 비슷한 사건들이 나중에 뉴스로 나오는 걸 보면서 ‘정말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스스로를 믿으며 나선형으로 나아가기

요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최근에 생긴 새로운 관심사나 취미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요즘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어요. 이런 것도 말해도 되나요? (웃음) 1년 좀 넘게 했고요. 제가 앉아서 일하다보니 목에 통증이 자주 오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할까 고민하다가 요가를 시작하게 됐어요. 제 몸 상태에 딱 맞는 운동이라서 잘 적응해서 하고 있습니다.”

최근 페미니즘이나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작가님도 그런 느낌을 받으신 적 있나요?

“‘콘텐츠’나 ‘이야기’ 분야에만 한정해서 말하자면 저는 여성의 이야기가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고 생각을 합니다. 근래 여성 창작자들이 활발하게 자신의 삶과 생각과 신념을 다양한 장르와 형태의 이야기로 쓰고 계신다고 생각해요.”

혹시 무기력함이나 허무함을 느낄 때는 없으세요?

“당연히 있죠. 그럴 때마다 항상 떠올리는 이미지 하나가 있는데요. 호주제 폐지할 때 법원 앞에서 갓 쓰신 분들이 ‘호주제 폐지 결사 반대!’ 이런 피켓 들고 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굉장한 위안을 받아요. (웃음) 그런 과거가 지나갔고 지금은 호주제가 없는 세상을 살고 있죠. 또 몇 년 전에는 낙태죄 위헌 판결이 나기도 했고요. 물론 항상 그렇게 나아진다는 기분만 느끼지는 않고, ‘이거는 예전보다 더 후퇴한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을 수 있지만 역사는 크게 보면 나선형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요. 잠시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분명 있지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크게 보면 나선형으로 둥글게 둥글게 나아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힘이 좀 나지 않을까요?” 

역사는 나선형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큰 위로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 나아감의 순간이 오기까지 여성들이 포기하지 않고 쌓아나가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스스로를 덜 의심하는 것, 그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잘 안 되긴 하는데요. 근래 알게 된 심리학 용어인데 ‘가면증후군’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놀란 적이 있어요.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얻어졌다 생각하고 지금껏 주변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심리를 말한다고 해요. 그 개념을 알고 나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가 평생 해온 생각이랑 너무 똑같았거든요.”

작가님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하셨어요?

“네. 어렸을 때부터 객관적으로 성취라 불리는 것을 해 낼 때마다 ‘나는 운이 좋았지, 상황이 좋아서 운 좋게 여기까지 왔고 ‘원래대로’였다면 이정도는 어려웠지’ 하고 생각했거든요. 학생 때부터 사회생활을 할 때도, 또 작가가 되고 난 후에도 그런 생각이 은은하게 기본 전제로 제 안에 깔려 있었어요. 그런데 가면 증후군에 대해 공부해보니 여성들에게서 특히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우리는 좀 덜 겸손해도 되지 않을까. 나에 대한 의심을 덜 하고, 나 자신을 믿어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내 자신도 나를 믿어주지 못하는데 누가 저를 믿어주겠어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덜 하면 좋겠어요. 

직장인 여성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네요.

“맞아요. 업무를 할 때나 조직생활을 할 때 나의 성과를 스스로를 너무 축소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차라리 과장해서 생각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이전에 창비에서 하신 인터뷰에서 ‘독자란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이다’라고 답해주신 걸 봤어요. 독자들이 작가님의 작품을 읽고 어떤 걸 느꼈으면 하는지, 이 인터뷰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계속 소설을 쓸 수 있는 거니까요. 저 역시 소설가이기 이전에 독자이기도 한데, 소설이라는 게 신기해요. 너무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추천까지하고 다녔는데 사실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못 하기도 하거든요. 여러번 읽은 소설인데도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 막 처음 읽는 것 처럼 읽고 그럴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 같은 건 마음 속에 고유한 흔적을 남기거든요. 주인공이 무슨 일을 겪게 되는지는 까먹어도 그 고유한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제 소설도 독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다면, 사실 그 이상으로 더 바라는 건 없을 것 같아요.”

#사회#인권#여성#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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