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206: 사라지지 않는' 인터뷰

허철녕 감독님은

한국전쟁(6·25 전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유해 발굴작업을 하는 시민발굴단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206:사라지지 않는>를 연출했어요. 시민발굴단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요.

김나경, 김소현님은

시민발굴단에 참여했어요. 두 분은 같은 과 선후배 사이로, 시민발굴단을 이끄는 노용석 교수님의 권유로 발굴단원이 되었어요.

 시민 발굴단원 박선주 교수가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어요.

‘206:사라지지 않는’이라는 영화를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허: 한국전쟁 학살 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을 하는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시민발굴단)’의 활동 과정을 담은 영화예요. 한국전쟁 후 약 3년에 걸친 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는데요. 60만~80만 명 정도가 학살된 걸로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정부 차원의 조사나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예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 어떤 사건이고, 왜 시민발굴단이 유해를 발굴하게 된 건가요?

허: 1945년 해방 후 한국은 냉전의 두 세력이 마주치는 지역이었어요.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남쪽과 북쪽은 이념을 이유로 끊임없이 갈등했고요. 대표적인 게 제주 4·3 사건이에요. 전쟁이 난 직후에도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대부분 ‘네 사상이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라는 것 때문이었어요. 

2005년에 결성됐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남한에 있는 학살지 전수조사를 했는데요. 최소 168곳의 학살지가 있다는 걸 파악했어요. 땅만 파면 유해가 나오는 학살지가 50여 곳이었고요. 그래서 진실화해위가 2009년, 2010년에 13곳에 대한 발굴을 진행했어요. 그런데 활동 기간이 정해진 위원회라는 한계가 있었어요. 위원회가 문을 닫고 나니, 유해 발굴을 할 기관이 아예 없어진 거죠. 그래서 시민들이 진실화해위가 조사했던 자료를 토대로 ‘힘이 닿는 곳까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발굴을 이어온 거예요.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항일독립운동,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일어났던 다양한 인권침해를 조사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독립적인 조사기관이에요.
 

감독님은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되셨나요? 

허: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영화는 감독인 제가 ‘김말해’ 할머니께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진행돼요. 말해 할머니는 밀양 지역 송전탑 건설 반대에 앞장섰던 주민 중 한 분인데요. 제가 이 사건을 (다른 영화로) 기록하면서 말해 할머니를 알게 됐어요. 이 분을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남편을 잃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가끔 할머니가 학살 현장에 관한 얘기를 종종 해주셨는데, 말씀하실 때 슬픔의 깊이라고 할까요? 그런 게 가늠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라는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러던 차에 우연히 시민발굴단이 2014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SNS로 알게 됐고, 2017년부터 저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정부는 한국전쟁 전 좌익사상 전향자를 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요. 여기에는 좌익과 관련 없는 평범한 국민이 가입되기도 했다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보도연맹 가입원들을 불러 모아 가뒀고, 이들을 학살했어요.  
김나경 씨와 박선주 교수가 발굴현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영화를 보면 단원분들 중 젊은 두 분이 눈에 띄어요. 두 분은 어떻게 시민발굴단에 참여하게 되셨나요?

나: 저는 발굴단이 처음 결성됐을 때부터 참여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교수님의 추천이 제일 크긴 한데요. 교수님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학부생으로서...(웃음) 하지만 선택은 제가 했으니까, 그 이유를 말씀드리면요. 부끄럽지만 저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이걸 알고 충격이 너무 커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참여하게 됐어요.

소: 나경 언니가 말한 교수님이 제 지도 교수님이시기도 한데요. 제가 1학년 첫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지각하신 거예요. 그런데 교수님이 워커에 흙이 묻은 채로 들어오시면서 “발굴하느라고 늦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엄청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경 언니랑 같은 학회를 했는데, 겨울방학 때 언니가 발굴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때는 저도 나경 언니를 좀 무서워해서(웃음) 가야 한다는 마음 반, 교수님이 하신다는 발굴이 궁금한 마음 반으로 참가하게 됐습니다. 
 

발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나: 유해를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전에 ‘개토제*’를 하는데요. 그때 기자분들이 엄청 많이 오세요. 한참 사진 많이 찍고 기자님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그제야 유족분들이 나타나세요. 근데 그게 전 너무 슬픈 거예요. 그분들이 엄청 어릴 때 이유도 모르고 가족을 잃었는데, 그걸 어디에 따지지도 못하고 계속 속으로 삭이셨을 거 아니에요. 슬픈데 슬프다고 말씀하시지도 못하고 평생 그렇게 살아오셨잖아요. 그래서 기자분들이 그걸 찍으러 왔는데도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거죠.

* 개토제: 건물을 짓거나 묘를 만들 때 땅을 파기 전에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예요. 개토(開土)는 땅을 연다는 뜻이에요.

소: 처음에는 그냥 뼈로 보였는데, 발굴할수록 이게 점점 한 명의 사람으로 느껴졌어요. 발굴하면서 가장 애정이 생겼던 건 두개골이었어요. 어떤 사람을 인식할 때 얼굴을 보고 인식하듯이, 두개골을 발굴하면 정말 그 사람을 찾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비슷한 맥락으로 충남 홍성에서 발굴할 때는 라이터를 하나 찾았는데, 거기에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요. 이름이 적힌 유품을 보니까 ‘내가 진짜 사람을 찾은 거구나’라고 느껴져서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묻혀 있던 학살 피해자의 유해가 발굴된 모습이에요.

발굴단 활동 후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나요?

소: 이런 역사적 문제를 제가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에 반성을 많이 했고, ‘국가’라는 게 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우리가 국가를 너무 모르고 있지는 않았나... 발굴단 활동하기 전에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확실하게 결정할 저만의 이유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발굴단 활동을 계기로 마음을 확실히 정했어요. 지금은 대학원에 와서 국가와 단체가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어요. 

허: 연대라는 마음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좀 거창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쉽게 풀면 그냥 함께한다는 거예요. 발굴 현장에는 10대 초등학생부터 80대 노인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 와서 일을 하세요. 힘이 좋은 사람은 흙을 나르고, 섬세한 사람은 뼈를 파내서 유해를 노출하는 작업을 하고요. 아주 어린 아이들은 체질이라고 하는데, 놀이하듯 체를 흔들면서 혹시라도 있을 탄피나 치아 같은 걸 찾아요. 저는 현장을 보면서 가장 비인간적인 땅 위에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가득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게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 솔직히 국사 시간에 ‘태정태세문단세’ 이런 건 많이 외웠지만,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건 몰랐잖아요. 이런 걸 몰랐다는 것에 대한 자아 성찰이 가장 컸어요. 저도 평범한 시민 중 한 명인데, 이렇게 제가 했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고,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생기더라고요. 그게 제일 크게 바뀐 점인 것 같아요. 

 

오래 전 사건이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가깝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허: 이런 사건을 우리가 기억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재발 방지거든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공교롭게도 시민발굴단이 만들어진 2014년이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해예요. 그 참사를 보면서 국가폭력과 비극은 계속해서 반복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라는 게 먼 얘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비교적 가까운 2010년대에도 참사가 있거든요. 그때 우리가 느꼈던 충격과 트라우마가 떠오르실 거예요. 시기와 사건의 내용은 다를지언정 참사가 일어나는 방식이나 이걸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2023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세대가 그런 참사와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 이 영화를 보면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소: 유족분들 만나면서, 그분들이 감정이 북받치셔서 울고 하실 때 같이 슬프고 그런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한편으로는 ‘내가 과연 유족분들의 아픔을 진짜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저는 발굴에도 참여하고, 유족분들을 만나면서 슬픔에 조금은 더 다가갈 수 있었지만, 이런 얘기를 전해 듣기만 하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걸 더 많은 사람이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 한국전쟁이 비교적 현대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묻어둔다고 해서 이런 참사나 학살이 드러나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이렇게 (발굴을 통해) 드러난 부분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나 기록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야 잊지 않을 수 있어요.

 

이미지: ⓒ찬란
#사회#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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